고향에서 놀러 온 친구가 말했다.
“경남 사람한테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하잖아? 그거 보지 말자는 소리다.”
그 무렵 수도권에는 며칠간 함박눈이 내렸던 터. “엥? 거긴 눈 안 왔나?” 당연히 친구도 눈을 봤겠거니 생각한 내 질문에, 그녀는 ‘모르는 소리 하고 앉아 있네’ 하는 표정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고 보니 고향에서 지낸 19년 동안 눈이 펄펄 내리는 풍경은 한 번밖에 본 적 없었다. 눈사람 굴리고, 눈 뭉치 날리는 것들은 죄다 남 얘기였다. 싸락눈조차 귀했으니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낭만적인 고백은, 아무렴 고향 사람들에겐 완곡한 거절과 다름없었다.
서울 온 김에 눈이나 봤으면 좋겠다던 친구는 맛집 대기 등록을 하다가 우연히 눈을 만났다. 흰 먼지라고 해도 될 법한 눈이었는데 그녀는 아이처럼 들떴다. 그마저도 몇 분 만에 사라져 버렸건만 친구는 올해 첫눈을 봤다며 내내 기뻐했다. 그 맑은 웃음을 보자, 문득 그리운 얼굴이 스쳤다.
갓 서울에 올라와 소복이 쌓인 눈을 봤을 때, 나도 그렇게 좋아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도화지에 폭폭 발자국을 남기고, 우산 없이 눈을 맞으며 깔깔 웃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서울 토박이 선배가 말했다. “곧 눈이 지겨워질 거야. 나중에는 눈 예보 들으면 출근 걱정부터 하게 될 거고.”
그의 예견처럼 서울에 터 잡은 나는 눈을 일상적으로 보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눈 오는 게 당연한 삶. 눈길에 넘어지진 않을까 친구의 안부를 염려하고, 차가 막혀 지각할 땐 마른 투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은, 그럼에도 눈은 나에게 언제나 반가운 손님이었다. 눈송이가 내리면 고양이와 창밖을 구경하고, 마침내 쌓이면 옷을 단단히 싸매고 나가 순백의 풍경에 나를 담았다. 기어코 눈을 뭉쳐서 손끝을 발갛게 물들이는 무모함도, 눈이니까 괜찮았다. 곳곳에서 인사하는 눈사람을 보면, 들뜬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첫눈을 기다리는 친구에게도, 새하얀 동네를 산책하는 나에게도 눈은 기꺼운 소식. 또 설산 여행을 꿈꾸는 엄마에게도, 말갛게 웃으며 눈오리를 빗는 아이에게도 눈은 다정한 선물.
그저 내리는 것만으로 무뚝뚝한 장면을 보드랍게 녹이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