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때 뜬금없이 작곡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운명적인 결심 같은 건 아니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음악 선생님께 잠깐 작곡을 배웠던 연을 붙잡아, 주말마다 선생님 댁에서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만한 민폐가 없는데, 당시에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었다. 선생님은 기초적인 이론을 가르쳐 주시는 한편, 나에게 피아노를 배워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나는 집 앞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바로 등록했다. 레슨비는 10만 원 남짓. 오래전 피아노를 배웠던 경험 덕분에 그럭저럭 베토벤 몇 곡을 뗐다. 곧 선생님은 내게 부산에 있는 과외 선생님을 추천해 주셨다. 입시를 준비하려면 전문가에게 지도를 받는 게 좋겠다고.
과외 선생님과 약속을 잡고, 홀로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레슨실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한 면담과 테스트를 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 현실적으로 어떤 대학을 목표로 할지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외비. 한 달에 60만 원. 그 말을 듣자마자 ‘아 나는 작곡 못 하겠구나.’ 단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작곡을 포기해야 한다는 아쉬움보다, 우리 집 형편이 서러워서 울었다. 피아노 학원비도 벅찬데 60만 원이라니. 이면에는 그만큼 돈을 투자할 만한 재능이 나에게 없다는 자각이 있었다. 나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눈이 퉁퉁 부어 돌아온 나를 보고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다른 설명 없이 그냥 작곡을 안 하겠다고 말하고는 방에 틀어박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 모습에 애가 끓은 엄마는 왜 그러냐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과외비가 60만 원이래.” 엄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피아노 학원 원장님께도 작곡을 그만둔다고 말씀드렸다. 그맘때쯤에는 원장님이 내 사정을 아시고, 레슨시간 외에도 언제든 학원에서 연습하라고 배려해 주신 터였다. 원장님은 내 표정을 보고 단번에 의중을 알아채셨다. 그리고 학원비를 돌려주시며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돌고 돌아서 결국엔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될 거야.”
2년 후. 입시를 앞두고, 나는 뜬금없이 영화를 전공하기로 했다. 영화 보는 거 좋아하고, 수능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무심하게 선택했다. 그러나 겁 없이 들어간 영화과는 감히 나 따위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재능과 열정이 용광로처럼 들끓는 그 속에서 나는 자꾸만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제대로 된 시나리오 한 편, 변변한 연출작 하나 남기지 못하고 졸업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나는 또 상업영화 현장에 가기로 결정했다. 영화사에 이력서를 쓰고, 면접을 보고, 덥석 붙어서 무작정 일을 시작했다. 작품을 위해 밤낮없이 전력하는 사람들 안에서 나도 열의를 가지고 일했다. 그럼에도 방황하는 마음은 떠나지 않았다. 언제나 겉돌고 있다는 감각. 동료들처럼 영화에 큰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없고, 사실 뭘 잘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사 대표님이 나에게 책 한 권을 읽고, 감상을 써달라고 하셨다. 나는 고심 끝에 A4용지 한 장짜리 글을 써서 메일로 보내고, 말도 없이 퇴근해 버렸다. 내 글을 보이는 게 무서웠다. 내 글을 형편없다고 생각할까 봐, 그래서 나도 형편없는 사람이 돼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대로 메일이 묻혔으면 하고 바랐다.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글 잘 봤네. 왜 말도 없이 갔는가?”
머뭇거리는 내게 그는 말했다.
“자네 글이 아주 좋아. 글을 계속 써봐.”
나는 그 말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어느덧 프리랜서 7년 차. 나는 문득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로이 글쓰기 모임에 나가서 글을 배우고, 글을 읽고, 글을 썼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쓰면서, 나는 불안에 떨었다. 채워지지 않는 문장과 내 글을 본 사람들의 침묵은 ‘하지 마, 그만둬, 넌 재능이 없어.’라고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타인의 반짝이는 생각과 탄력 있는 이야기를 읽으면 저런 사람이야말로 글을 써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좌절했다.
뿌리내리지 못한 확신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맸다.
그런 나에게 작은 말이 속삭였다.
“돌고 돌아서 결국엔 이곳으로 다시 오게 될 거야.”
“글을 계속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