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마당발이라 불리는 이들을 부러워한 적이 있다. 연락처에 수백 명이 등록돼 있고, 생일이면 축하 연락이 쏟아지고, 부르는 사람도 갈 곳도 많은 인싸.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내 지인 중에 OO 하는 사람 있는데 소개해 줄까?”라든가 “내 친구 OO에 있으니까 연락해 줄게.” 하며 전화 한 통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인맥왕 말이다.
그러나 한평생 인맥왕은커녕 인맥 백성도 되어본 적 없는 게 나다. ‘가만 보자, 만약 결혼식을 한다면 하객으로 부를 친구들이...’하며 손가락을 꼽다가 정색한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마저도 해를 거듭할수록 교류하는 이들이 줄어, 1년에 약속 다운 약속도 몇 번 없다. 이렇게 극강의 방구석 소심인이 된 지금. 호화로운 인맥왕이 부럽냐 하면? 더 이상 부럽지가 않어-
지난주 토요일, <2025 인천아트북페어>에 참가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지만, 출판사의 파워 외향인 두 분(편집자님, 마케터님)의 힘을 입어 용기를 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격한 파지트팀. 관람객 입장이 시작되어 인사를 하려는데 어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지런히 책을 소개해도 부족하건만, 말이 입술 뒤에서 꽉 막혔다. 동료들은 옆에서 열심인데,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내 모습에 시무룩. 오랜만에 마주한 내 소심력에 속으로 감탄과 경악을 번갈아 하고 있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 인천 사는 내 친구가 서 있었다. 꽃다발을 한 아름 들고, 남편, 아들과 함께 나를 보러 왔다. 말도 없이 어떻게 왔냐는 내 질문에 그는 “인천이니까 와야지~”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도리어 내 생일을 깜빡해 미안하다고 했다. 재작년에 만났던 우리는 10년 만에 본 것처럼 함께 울었다. 이 친구는 항상 그랬다. 내가 서울살이에 힘겨워할 때 곁에 있어 주고, 돈이 없을 땐 기꺼이 집을 내어줬다. 그때도 내가 미안해하자, 친구는 말했다. “너도 내가 갈 곳 없으면 똑같이 했을 거잖아.”
친구 덕분에 모든 게 빛났다. 페어를 준비했던 노력, 부스에서 자리를 지키는 긴장, 사람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내 소심함마저도 다 괜찮아졌다. 친구는 잠투정하는 아이를 달래다 일찍 떠났다. 잠시 후, 내가 만든 키링을 가방에 달고 귀엽다는 응원까지 챙긴 내 친구.
한참 감동에 헤엄치고 있을 무렵, 우리 부스 앞에 한 아이가 멀뚱멀뚱 섰다. 그 아이를 보며 무심코 ‘우리 조카 닮았네...’라고 생각하는데, 어라? 진짜 내 조카였다.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니, 사촌 언니와 형부, 첫째 조카가 킥킥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없이 용인에서 날아온 내 가족. 조카들은 “이모, 이모” 노래를 부르며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 마음의 날씨가 화창해졌다.
언니네 가족은 나들이 삼아 페어를 구경하며 나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엽서를 써서 찔러주기도 하는 등 무언의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 힘으로 마침내 “스티커 받아 가세요~” 하고 입 떼기에 성공한 나. 그런데 이번에는 한 여인네가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대구에 사는 사촌 동생 등장. 어안이 벙벙해 말을 더듬는데, 뒤에서 동생의 남자 친구가 인사를 건넸다. 마침 근처에 살고 있어서 들렀다는 소식. 심지어 언니와 동생은 서로 오는 줄도 모르고 있어서, 우리는 뜻밖의 가족 상봉을 했다. 나의 두 번째 에세이 『소심백서』에 나오는 자매와 소심백서 부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생 첫 페어가 사랑하는 이들 덕분에 찬란해졌다.
어느덧 페어 막바지. 마케터님과 편집자님은 막판 스퍼트를 내어, 책도 굿즈도 전력을 다해 판매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내 말에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된다고 격려해 주는 그들. 내 몫까지 2인분씩 목청 높이는 둘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책과 페어를 통해 얻은 가장 소중한 건, 다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모자란 나를 이끌어주는 두 분이 있어서 세상으로 나와, 새로운 걸 배우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었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는 길, 인천의 붉은 노을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지 실감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소수다. 그럼에도 기죽지 않는 건, 그 소수가 좋은 사람이라서, 그리고 나와 결이 닮은 사람이라서다. 갈닦인 관계는 깊고, 편안하다. 내가 흔들릴 때 말없이 등을 내어주고, 가만히 지탱해 준다. 나에게는 딱 이 정도가 적당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 이만큼만.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우주의 원리가 그러하듯 소수여서 귀하다. 귀한 걸 받은 나는 부자와 다름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