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몇 번 두드리면 더치페이가 뚝딱 되는 세상. 그러나 내 어린 시절만 해도, 1/N이 당연하지 않았더랬다. 계산은 손윗사람이나 고소득자, 또는 좋은 일 있는 사람이 하는 게 자연스러웠달까? 더치페이라고 하면 왠지 해외 도시에 사는 외국인들이 할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물 건너온, 정 없고 차가운 문화라고 생각했다. 피처폰으로 고작 붕어빵 타이쿤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성인이 되고 뒤따라 씀씀이도 커졌을 무렵, 더치페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가 한꺼번에 계산할게, 나중에 보내줘.”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제자로 나설 수 있다는 건 여럿이서 먹은 밥값, 즉 최소 몇만 원을 지불할 능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고로 가난한 알바생인 나로서는 언감생심 넘볼 수 없었던 지위. 보통 이 역할은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한 친구가 도맡곤 했는데, 계산대에서 카드를 척 내미는 그의 뒷모습이 그렇게 멋있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턱내는 게 도리어 비일상이 된 요즘. 오늘도 각자 몫을 계산하다가, 문득 각자내기만큼 정다운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모조모 들여다보면 다정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일단 각출의 바탕에는 누구에게도 부담을 몰아주지 않겠다는 마음이 깔려있다. 한 명이 많이 내면 선의일지 언정 버겁기 마련이고, 그런 일이 쌓이다 보면 만남이 꺼려질 수도 있다. 따라서 계속 보고 싶다는 무언의 애정을 1/N씩 나눠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이 총액을 먼저 지불하고 후에 받는 경우, 그는 시간을 들여 정산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그뿐인가, 10원 단위는 물론 100원 단위까지 말없이 절사하는 이도 있는데, 그 행위에는 상대방을 위해 정확한 셈 따위 기꺼이 눈감아 주는 너그러움이 담겨있다. 그 배려에 화답하여 돈을 보내고, 고맙다는 메시지를 남기기까지 온통 배려가 스며 있다.
가게에서 본인 몫을 한 명씩 계산하는 순간도 마찬가지. 사실 점원에게나 손님에게나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건만, 다들 군말 없이 기다린다. 줄줄이 서서 카드를 내미는 장면이 나에게는 오리가 줄지어 유영하는 모습처럼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