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언젠가 동료들과 ‘덕후’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덕후의 열정이 멋지다는 감탄과 함께 모두 그렇게 푹 빠져본 경험이 없다는 토로. 동료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시옷 님은 만화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좋아하기는 하는데 덕후라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죠.” 나 정도는 그냥 인기 웹툰이나 애니를 보는 평범한 독자이지, 감히 덕후를 논하기엔 조예가 얕았다.
내 말에 동료 A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저는 기계식 키보드를 좋아하는데요. 덕후에는 영 못 미쳐요.” 그러면서 <서울 기계식 키보드 박람회>에 다녀온 썰을 풀었다. 그곳에 어떤 기계식 키보드가 있었고, 그중에서도 엄청난 키보드가 있었는데, 그걸 커스텀 한 덕후분이 멋있어 보였다는 후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들뜬 얼굴과 가방에 달린 키보드 키링을 보며 생각했다. ‘덕후 맞으신 거 같은데...’ 물론 겉으로 표현하진 못했다.
지난 주말, e스포츠팀 T1의 홈그라운드 경기를 보러 가는 길. 차 안에서 신나게 웹툰을 보다가, 문득 얼마 전 일이 떠올라 이응이에게 말했다. “있잖아, 내가 공항에서 대기할 때 웹툰을 보고 있었다? 근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덕후라고 생각할 수 있겠더라고. 나 덕후 아닌데 ㅋㅋㅋ” 내 말에 이응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너 덕후 맞아.” 이번에도 나는 극구 부인했다. 나 따위가 어떻게 덕후냐며, 덕후를 모독하지 말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응이는 단호했다.
- 너 쉴 때 뭐해?
- 웹툰 보지.
- 웹툰 좋아해, 안 좋아해?
- 좋아하지.
마침내 이응이가 방점을 찍었다.
- 꼭 1등이어야 덕후냐? 꼴등도 덕후는 덕후지.
T1 홈그라운드 경기장에 도착하자 인파가 펼쳐졌다.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폭주 기관차처럼 뛰기 시작했다. 평소 사진 찍는 걸 부끄러워하는 나인데 선수들 사진 앞에서 포즈를 잡질 않나, 치어풀에 ‘Faker 대상혁’을 적고 그림을 그리질 않나, 의식할 새도 없이 갖은 호들갑을 다 떨었다. 선수가 등장할 때는 손목이 부서져라 짝짝이를 흔들고, 소리친 나. 옆에서 나 못지않게 흥분한 이응이와 남녀노소 T1을 응원하는 이들로 가득한 그곳은 덕질의 현장이었다.
끼니를 거르고 이어진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띠게 호응했다. 경기는 물론 이어진 팬미팅에서도 선수들의 작은 말, 몸짓 하나에 꺄르르 넘어갔다. 선수들이 그냥 하품해도 나는 물개박수를 쳤을지 모른다. 특히 마지막 페이커 선수의 깜짝 재계약 소식에는 T1 팬이라는 자부심에 충만해져, 전투에서 승리한 전사처럼 괴성을 질렀더랬다.
폐막식이 끝난 후, 일대는 T1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T1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도 있고, 거기에 더해 응원봉, 머리띠, 타투 스티커로 무장한 이도 있었다. 그 속에서 함께 걸어간 나와 이응이. 비록 T1 굿즈 하나 없지만, “즐거웠다.”를 연신 말하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덕후였다. 꼴등 덕후도 아무렴 덕후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