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옛날 옛적에 엄마는 말씀하셨다.
“엄마 어렸을 때는 짜장면이 300원이었어.”
세상에 짜장면이 300원이라니. 어린 내 상식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금액에, 나는 엄마의 말을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풍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 조카들이랑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고야 말았다.
“이모 어렸을 때는 아이스크림이 200원이었어.”
내가 가격을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나의 최애 ‘초키초키’가 200원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여름, 초키초키 8개를 먹고 으스대다가 하루 종일 화장실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쭈쭈바는 200원, 하드라고 불렸던 막대 아이스크림은 300원, 콘 아이스크림은 500원이었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면 알찬 쇼핑이 가능했던 그때 그 시절 이야기.
나는 빵빠레 사준다는 한마디면 그 무서워하던 치과에 따라갈 정도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선호했던 맛은 초코와 바닐라. 초코는 초키초키, 빠삐코 같은 쭈쭈바부터 쌍쌍바, 엔초 같은 하드, 그리고 희대의 이상한 아이스크림 거북알까지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바닐라도 빵빠레, 설레임, 투게더에, 이웃 격인 붕어싸만코까지 섭렵했다. 거기에 수박바, 스크류바, 죠스바 같은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도 섭섭지 않게 챙겼더랬다.
지갑에 천 원짜리 지폐가 등장할 만큼 컸을 무렵에는 ‘월드콘’을 자주 찾았다. 콘 아이스크림 계의 터줏대감, 원 앤 온리, 클래식 그 자체인 월드콘은 바닐라, 초코에 바삭바삭한 과자까지 곁들일 수 있는 일석삼조 아이스크림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몇백 원 비쌌지만, 기꺼이 투자할 가치가 있는 아이스크림. 끝부분에 앙증맞게 자리 잡은 초코는 아무리 엄마여도 양보할 수 없는 감동적인 맛이었다.
그러나 월드콘으로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아이스크림은 따로 있었다. 1년에 만나 뵐 기회가 세 손가락 꼽을 정도로 귀하디귀한 최상위 포식자, 바닐라 계의 명품 ‘엑설런트’였다. 부자 친구네에 놀러 가거나, 친척이 다 모인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엑설런트는 행여 녹아서 사라질까, 껍질도 조심히 벗겨가며 한 알 한 알 아껴먹는 아이스크림이었다. 다른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차원이 다른 보드라움과 깊은 풍미. 어른이 되고서는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었지만, 강력한 아우라가 뇌리에 박힌 탓인지 쉽사리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었다.
반면 불호였던 아이스크림은 바밤바, 아맛나, 비비빅으로 대표되는 어르신 풍 아이스크림. 시골에 사는 큰 이모는 여름 방학에 놀러 올 어린 조카들을 위해 아이스크림을 가득 준비해 두셨다. “얘들아, 아이스크림 먹어라~” 이모의 부름에 후다닥 뛰어가서 냉동칸 문을 열면, 까꿍- 고개를 내미는 아이스크림 선생님들. 희망을 버리지 않고, 두더지가 땅 파듯 냉동실을 파고들지만, 눈앞에는 바밤바, 바밤바, 아맛나, 아맛나, 비비빅, 비비빅... 그러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자에게 깊은 산속 산삼처럼 몸을 드러내는 아이스크림이 있었으니, 이름도 구수한 누가바였다. 누가바 미만은 이걸 누가 먹나 싶지만, 막상 한입 베어 물면 폭 빠지고 마는 게 시골 아이스크림의 매력이었다.
어린이의 여름을 책임 지던 아이스크림은 어느 날 동전으로 살 수 없을 만큼 값이 오르더니, 콘 아이스크림 가격이 2천 원을 돌파하면서 기어이 선을 넘었다. 마트 할인, 편의점 1+1행사 등 놀란 가슴을 달래기 위한 차선책이 이어졌지만 이미 상처받은 마음은 쉬이 회복되지 않았고, 그 후로 커피, 밀크티, 스무디 등이 빈자리를 채우면서 결국 예전만큼 아이스크림을 찾지 않게 됐다.
이런 내 마음에 다시 불씨를 지핀 건, 집 앞에 있는 무인 아이스크림 할인점. 무심코 들어갔다가 추억의 옛 아이스크림부터 상상 초월 신상 아이스크림까지 공작새처럼 화려한 아이스크림들을 보고, 나는 홀린 듯 지갑을 열고 말았다. 무더운 날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입 베어 무는 아이스크림, 여름밤 영화를 보면서 한 통 떠먹는 아이스크림. 아무렴 여름엔 아이스크림만 한 게 없지. 특히 지난달에 받은 민생회복 소비쿠폰으로 야금야금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게 소소한 재미가 되었다.
근래 가장 즐겨 먹는 아이스크림은 ‘팥빙수’. 팥빙수 아이스크림에 우유를 곁들여 먹으면 값비싼 팥빙수 저리 가라다. 초코, 바닐라는 여전히 좋아하고,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땐 커피, 딸기, 요거트 등 다양한 맛을 즐긴다. 어렸을 때 기피했던 비비빅도 지금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 다만 내 돈 주고 사 먹지 않는 단 한 가지 맛이 있는데 그건 바로 민초다. 민초파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민초는 200원이라도 안 먹을 거다. |